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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을풍경! 가을시!

연실이 2007. 9. 29. 08:21

 

 

단풍들고 싶다 / 최옥

 

이 가을 나도
단풍들고 싶다

눈부신
기다림의 색깔에
나의 전부를
물들이고 싶다

그리하여
머물 수 없는 바람도
내 가슴에
머물게 하고

창백한 우리 사랑에
고운 빛깔을
입히고 싶다

 

 

 

사람의 가을 / 문정희

 

나의 신은 나입니다. 이 가을날
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
내가 나의 신입니다
별과 별 사이
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
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
자르고 잘라서
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
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
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
저 잎과 저 새를
언어로 옮기는 일이
시를 쓰는 일이, 이 가을
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
저 하나로 완성입니다
새, 별, 꽃, 잎, 산, 옷, 밥, 집, 땅, 피, 몸, 물, 불, 꿈, 섬
그리고 너, 나
이미 한편의 시입니다
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.

 이 가을날...

 

 

 

가을 같은 그대에게 / 안희선


푸른 하늘 울음에 못내 앓는 그리움

흐느끼는 바람의 호흡에 실린 가을의 내음이
낙엽을 등에 진 땅 구석 구석 배어듭니다.

문득,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덧없는 미소

삶은 연습일 수 없기에,

미처 추스리지 못했던
애틋한 기억들이 낙엽처럼 뒹굽니다.

바람에 흔들리는 가을잎의 소리는,
처음부터 혼자였고 마지막에도

혼자일거라고 노래합니다.

하지만, 사랑도 없이 외롭게 산다는 건
얼마나 쓸쓸한 일인지요

바람결 뚫린 가슴에,

외로움 젖어드는 날

빈 몸이나마 서럽도록 살아가기에,
남아있는 설레임으로 마음의 창(窓)에 기대어
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당신을,
약속은 없었지만
기다립니다.

 

 

 

가을에 오십시오 / 송해월


그대
가을에 오십시오

국화꽃 향기
천지에 빗물처럼 스민 날

서늘한 바람에
까츨한 우리 살갗
거듭거듭 부비어대도 모자라기만 할
가을에 오십시오

그리움
은행잎처럼 노오랗게 물들면
한잎 한잎 또옥 똑 따내어
눈물로 쓴 연서(戀書)

바람에 실려 보내지 않고는
몸살이 나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날

날이면 날마다
그리움에 죽어가던 내 설움에도
비로소 난 이름을 붙이렵니다
내 영혼을 던졌노라고

그대 가을에 오십시오

 

 

 

가을 애수 / 안갑선

 

가을엔 낙엽만 쌓이는 줄 알았는데
그대 그리움도 쌓여만 가네
서걱이며 밟히는 저 소리 또 들린다

가을이란 미명으로 온전히 사랑하며
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아
색바랜 사진 속 얼굴에 나뭇잎만 뒹구네

사색을 접고 낙엽이라는 이름으로
그대 이름일랑 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
소적한 숲에서면 그 이름 뇌아려지네

소쇄한 아침이야 가을 바람 나뭇잎 나굴듯한
가슴에 맴도는 그대 형상 멎는 날 맞으리
그날까지 잔 바람에도 고독은 시리겠네

 

 

 

 

가을 유서 / 류시화

 

가을엔 유서를 쓰리라
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
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
눈꺼풀 위에
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
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
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
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
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
나 유서를 쓰리라

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
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
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
고독한 시체 위에
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
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
가장 먼 곳에서
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
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
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
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
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
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
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
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
이불을 덮어 주고
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
소리내어 읽으리라

 

 


 

 

어쩌지요, 가을이 간다는데 / 김용화


어쩌지요, 가을이 간다는데
무수한 낙엽의 말
귀에 들리지도 않아요

가을 숲엔 온통
공허한 그리움만 남아
마음 천지사방 흩어지네요

열정도 잠시 묻어야 할까봐요
잠시라면 괜찮을텐데
마음 동여맬 곳 없네요

어쩌지요, 가슴 저린 말들
쏟아 놓고 가을이 간다는데
잠시 고개 묻을
그대 가슴이라도 빌려야 겠네요